Risale-i Nur Collection

질문: 우리는 왜 경배를 하는 것일까요? 우리의 주님께서 왜 우리에게 이런 부담감을 짊어주셨을까요?

답변: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피조물들보다 인간에게 더 다양한 능력들을 부여해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. 특히 인간은 이성이라는 은총을 부여받아 무척이나 다양한 감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. 주위의 그 어떤 피조물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특징들, 능력들을 갖추고 있는 것은 인간의 임무 또한 다름을 의미합니다.

인간이 무척이나 우수하다는 관점에서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입니다. 그러나 이 능력들을 인간에게 아무 이유 없이 부여하지 않았다는 주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“나에게 물어보고 나를 창조했어?” 또는 “나는 부담을 지기 싫어. 동물처럼 그냥 편하게 살 거야”라며 그 주제에서 회피하고 싶어 합니다.

인간은 이렇게 생각하면 자신이 편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. 숭배행위로부터 멀리 벗어나거나, 경배행위들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생각합니다. ‘덥거나 추운 날에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그냥 편히 있는 것이 더 편해!’, ‘한 달 동안 매일 금식을 하며 배고픔을 느끼기보다는 원하는 시간에 먹고 마시는 것이 훨씬 더 편해!’라고 생각합니다. 맞는 말입니다. 좁은 창문에서 볼 때는 그렇게 보입니다. 경배 행위들을 실천하는 것이 불편함을 주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.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 자체에 모순됩니다. 이렇게 높은 하드웨어와 장비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물처럼 사는 것은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입니다. 이것은 높은 수준에서 낮아지는 것은 물론 동물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떨어짐을 의미합니다.

동물은 과거는 물론 미래도 없습니다. 굶을까 봐 걱정하지도 않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도 없습니다. 오로지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저 두려움을 느낄 뿐입니다. 하지만 그 위험한 상황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삶을 살아갑니다. ‘내일 혹시 안 좋은 일이 생길까?’라며 걱정하지도 않습니다.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며 편안하게 먹고 마시고 창조주께 감사합니다.

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. 이성과 이해하는 능력 같은 특성 등이 인간을 모든 상황으로 이끕니다. 한편에서는 어제 생긴 문제로 우리를 힘들게 할 때 다른 한편에서는 미래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이 우리를 옥죄어 옵니다. 바로 앞에 죽음 같은 큰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게 말이 됩니까? 주변의 친구나 가족들이 죽음이라는 문을 넘어가고 있음을 보면서도 ‘나는 동물처럼 살아갈 거야.’라고 하며 자신을 속일 수 있을까요? 우리 또한 똑같은 문으로 넘어갈 것을 알면서도 편안하게 앉아서 그 순간을 기다릴 수 있을까요? 우리를 그 문 앞으로 이끄는 매초, 매분, 매시간이 우리에게 형벌을 주는 게 아닐까요?

겉으로 보기에 편안해 보일지라도 내면에는 근심과 고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. 이처럼 인간의 수준 높은 하드웨어, 장비는 ‘동물처럼 살지 않을 것’ 또한 ‘부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’을 의미합니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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